봄이 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겨우내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무가 꽃을 피우고, 땅속의 썩어가던 씨앗이 흙을 뚫고 올라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의 섭리’로 여기며 쉽게 지나치지만, 가만히 보면 꽤 이상한 일입니다. 죽은 것에서 생명이 나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성경은 바로 이 이상한 장면을 부활의 언어로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네가 뿌리는 씨앗은 장래의 형체가 아니요 다만 알맹이뿐”(고전 15:37)이라고 했습니다. 씨앗은 완성품이 아니고 땅에 묻혀 죽어야만 전혀 다른 형체가 됩니다. 바울이 부활을 설명하며 철학이나 신학 언어가 아니라 창세기의 창조에 나오는 씨앗과 흙, 형체의 언어를 꺼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역전 즉, 창조가 부활의 배경이 아니라, 부활이 창조의 목적지가 된 것입니다. 처음 창조는 씨앗처럼 아직 완성이 아닌 상태이듯이 지금, 우리의 모습도 씨앗 단계로 완성품이 아닙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지금 이 몸, 이 상태를 너무 자주 결론으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아프면 아픈 채로 끝난 것 같고, 실패하면 실패한 채로 굳어버린 것 같습니다. 사실 씨앗은 썩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죽음처럼 보이는 과정이 사실은 변화의 과정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씨앗이 저절로 꽃이 되지 않는 것처럼, 창조에서 부활로의 이행은 누군가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단지 2천 년 전 ‘옛날 일’로 두거나 끝내면 씨앗 이야기도 그냥 계절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첫 열매’라면, 수확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겁니다. 자연은 봄마다 씨앗이 죽고 다시 살아나는 장면을 매년 반복하며 지금 이 상태가 끝이 아니라고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고전 15:37)
봄이 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겨우내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무가 꽃을 피우고, 땅속의 썩어가던 씨앗이 흙을 뚫고 올라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의 섭리’로 여기며 쉽게 지나치지만, 가만히 보면 꽤 이상한 일입니다. 죽은 것에서 생명이 나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성경은 바로 이 이상한 장면을 부활의 언어로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네가 뿌리는 씨앗은 장래의 형체가 아니요 다만 알맹이뿐”(고전 15:37)이라고 했습니다. 씨앗은 완성품이 아니고 땅에 묻혀 죽어야만 전혀 다른 형체가 됩니다. 바울이 부활을 설명하며 철학이나 신학 언어가 아니라 창세기의 창조에 나오는 씨앗과 흙, 형체의 언어를 꺼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역전 즉, 창조가 부활의 배경이 아니라, 부활이 창조의 목적지가 된 것입니다. 처음 창조는 씨앗처럼 아직 완성이 아닌 상태이듯이 지금, 우리의 모습도 씨앗 단계로 완성품이 아닙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지금 이 몸, 이 상태를 너무 자주 결론으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아프면 아픈 채로 끝난 것 같고, 실패하면 실패한 채로 굳어버린 것 같습니다. 사실 씨앗은 썩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죽음처럼 보이는 과정이 사실은 변화의 과정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씨앗이 저절로 꽃이 되지 않는 것처럼, 창조에서 부활로의 이행은 누군가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단지 2천 년 전 ‘옛날 일’로 두거나 끝내면 씨앗 이야기도 그냥 계절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첫 열매’라면, 수확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겁니다. 자연은 봄마다 씨앗이 죽고 다시 살아나는 장면을 매년 반복하며 지금 이 상태가 끝이 아니라고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고전 15:37)
김재홍 목사(2026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