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초장

성령님은 내 안에 머물려고 오신 게 아닙니다 (김재홍 목사)

정형철
2026-04-10

은혜받았다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머무는 것”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충만하다, 임했다, 받았다는 모두 도착의 언어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왔느냐, 내 기도에 응하셨느냐, 내 예배에 임하셨느냐도 신앙의 중심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면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성령이 임한 그날, 예루살렘에는 천하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누가는 그냥 "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해도 충분한데 굳이 낯선 이름을 열다섯 개나 나열합니다. 그 목록은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니라, 성령이 향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지도입니다. 성령은 그날 한 방에 머물지 않고 온 세계로 출발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받았는가, 충만한가, 유지되고 있는가처럼 소유의 언어로 말합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성령은 처음부터 “보내는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며 하신 말씀도 “너희가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였지, “너희가 권능을 받고 충만함을 누리라”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의 목적지는 내 내면의 평안이 아니라, 내 발걸음이 닿는 땅입니다. 물론 성령의 위로와 내주하심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성령을 “머물게 하는 것”에만 몰두하면 성령이 원래 우리를 "데려가려던 방향"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감동적인 예배를 드린 후 “오늘 성령님이 임하셨다”라고 고백한다면, 그다음 날 나는 어디론가 움직여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삶의 동력으로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신앙의 훈장처럼 간직하고 있습니까? 성령은 당신을 안전한 자리에 붙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누군가에게로 보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머무는 성령이 아니라 보내는 성령, 그 방향을 회복하는 것이 오순절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김재홍 목사(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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